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리야마 아키라 (문단 편집) == [[만화가]]로서의 입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산명.jpg|width=100%]]}}} ||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만화가로 서구권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별세에 전 세계가 애도의 물결을 보냈다. 이러한 인기 덕분에 일본 만화가 중, 가장 돈을 많이 번 사람으로도 유명하며[* [[뉴타입]]에 공개된 토리야마 인터뷰에 따르면 드래곤볼 프리저 편 기준, 550만 엔 즉, 한 회당 2015년 기준 환율로 약 5,000만 원. 심지어 실수령 액수이다. 셀 편에서는 더 많은 보수를 받았다고 하는데 공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단행본 판매 수익에 비하면 새발의 피. 당시와 지금의 물가 차이를 고려하면 이 차이는 더 벌어진다.] 일본 내에서 납세 1위(기타 문화인 부문)[* 정확히는 1981년에 [[만화가]]로는 최초로 5억엔의 소득을 신고해 일본에서 고액납세자공시 기준으로 전체 랭킹 35위에 올랐다. '''[[닥터 슬럼프]] 하나만으로도 이 정도였는데 [[드래곤볼]]은.''' 다만 1983년 이후 공식적인 소득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를 2년 연속 기록한 적이 있었다. 오죽하면 세금 때문에 거주 지자체인 [[아이치현]]에서 이사도 못 가게 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 물론 실제로는 정말로 못 가게 하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고, 집 앞에 공항 직통 도로를 깔아줬다는 도시전설도 사실이 아니지만, 이러한 도시전설이 생길 만큼 토리야마가 내는 납세액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건 틀림이 없다. 일본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만화가로서 이 정도로 성공한 케이스는 매우 드물다. 그 예로 [[1992년]]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에선 미국 만화가의 최고 갑부인 [[찰스 M. 슐츠]](<[[피너츠]]>의 원작자)보다 더 부자인 만화가라며 토리야마를 취재한 적도 있다. 아울러 [[나가이 고]] 이후로 천재 만화가라는 수식어가 딱 어울리는 인물로, 과감하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소년만화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82년도에 [[데즈카 오사무]]가 직접 "자신의 후계자가 나왔다"고 발언해서 화제가 되었던 일화도 있다. 이 일화 때문에 한국에선 토리야마를 2대 만화의 신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별명은 아니다. 다만 [[데즈카 오사무]]의 후계자라는 호칭 자체는 데즈카 오사무 본인이 발언했기 때문에, 반드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으며 실제로 토리야마는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의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15년간 작품을 주간 연재하면서 펑크를 낸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 더구나 블로그에서도 밝힌 것이지만 귀차니즘도 가지고 있고 모든 작업을 단독으로 진행한 것임에도 펑크를 낸 적이 없다.[* 초인기작 드래곤볼 작품 중기 한참 바쁠땐 어시스트를 1명, 가장 많을때 잠시 2명 두기도 하였으나 사람을 쓰는데 익숙한 사람도 아니고 나중엔 어시에게 지시하는 시간에 내가 그리는게 더 빠르다라는 이유로 다시 혼자 그리게 된다. 이래도 정 바쁠땐 부인이 도와주는 수준으로 2명을 넘지 않았다.] 초인기 작가라 온갖 게임, 컬러, 일러스트등의 일감을 동시에 소화하고 심지어 기한도 몰아치기 식이었는데도 말이다. 격투 소년물의 공식을 새로 쓰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성시켰다. 너무 완벽해서 더 추가할것도 뺄것도 없는 수준으로 드래곤볼을 보고 공부하며 등단한 원나블 작가들을 포함해 후대 작가 누구도 드래곤볼 작법 이상의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공식을 못내고 답습하고 있을 정도. 인품도 훌륭하다. 천성에서 기인한 바가 크나 타인을 헐뜯거나 질투하지도 않고 화실에서 어시에게 매우 잘해준것으로도 유명하고 [* 프리저 전 당시 어시가 한 명 있었고 이 사람이 주로 먹칠과 선긋기 작업을 했는데 작업량이 많아지자 토리야마에게 먹칠 언제 다하느냐고 걱정하자 토리야마는 어시에게 사이어인 등장하면 머리는 먹칠 안 해도 된다고 걱정말라고 했다고 한다. ] 그 많은 재산, 그 엄청난 유명세와 영향력에도 평생 범죄, 유흥, 과소비, 언행 등 구설수 하나 오르지 않고 직업과 가정에 충실했다. [* 탈세 해프닝이 말년에 있었는데 자산을 운영해주는 미국회사의 미국에서 발생한 탈세 사건이었고 토리야마 아키라는 관련이 없어서 추징 받지 않았다. 토리야마의 이름이 언급된 것도 당시 이 회사의 수천명의 고객 리스트 중에 유명인들을 기자들이 추려내서 자극적으로 기사를 썼기 때문.. 수천명중에 실제로 벌금을 낸사람은 거의 없는데 이유는 마음대로 고객몰래 자산을 운용하고 탈세로 발생한 낙전수익을 회사가 횡령하는 식이었으므로 당연히 회사가 처벌받았다.] 전에 없던 그만의 독특한 화풍도 인정받고 있다. 보통 작가들의 화풍은 전세대 만화가들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토리야마는 너무나 특이해서 등단부터 자신만의 오리지널 화풍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연재하기 전 1년간 악마같은 편집자에게 걸려 원고를 찢기는 수모를 겪으며 수업을 쌓았지만 그림 실력이 부족해서 찢긴 것은 아니여서 그림 수업을 한 기간은 아니다. 그의 단편 데뷔작을 보면 이미 아라레의 그림자가 보일 정도.] 어느 정도냐면 토리야마가 등단하기 전까지 점프잡지의 순위권의 거의 모든 만화들은 극화체, 실사체거나, 데즈카에게 영향받은 과장된 데르포메 화풍이 주류였는데 이 일본의 화풍이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때에 한 무명 작가가 등단과 동시에 인기까지 쓸어 담으며 흐름을 바꿔버린 것이다. [* [[https://s2.onimanga.com/scans/656b77281aa94c627a30e5a8/33/22-562cdc98.webp|당시 소년 점프 연재 중이었던 작가들의 화풍]]. 링크는 각 작가의 그림을 간략화 한 것임을 감안해도 토리야마 등단 전의 점프 화풍과 토리야마의 화풍이 얼마나 이질적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닥터 슬럼프가 한참 인기를 구가하던 당시엔 그의 화풍이 최신, 미래로 보였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만화가 지망생들에게 끼친 영향이야 말할것도 없고 점프에 이미 등단해 있던 인기 작가들도 공격적으로 자신의 화풍을 정립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게 만든 초대형 신인이었다. 1980년 1윌 이전 점프의 다른 작품들과 토리야마의 작품이 얼마나 이질적이고 앞서 간 건지는 그림 몇장만 나열해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닥터 슬럼프 연재 이전 점프 합본 표지[[https://img.mandarake.co.jp/webshopimg/01/00/389/0100101389/010010138950.jpg|#]] 이 때문에 토리야마의 화풍을 따라하는 정식 작가가 동인지 아마추어 시장 외에는 그의 영향력을 고려했을때 별로 없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인데 화풍이 너무 독창적이라 조금만 따라해도 열화표절이라고 욕을 먹기 때문에 일본 만화를 많이 표절하던 중국, 한국에서도 거의 따라하지 않았다. 그나마 따라 한다면 그가 즐겨쓰던 배경, 메카, 간략화, 컷배분 등의 기술적 부분 정도이고 인물 쪽은 차라리 참고하지 않는게 나을 정도.[* 일례로 일곱 개의 대죄의 작가인 스즈키 나카바의 경우 토리야마에게 영향을 많아 받았는데 이미 자신만의 그림체로 숙성된 지금까지도 드래곤볼 아류 작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다만 그가 존경하는 작가라서 그런지 이 평가를 크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모양이며, 그림체도 심하게 바꾸진 않았다.] [* 반면에 그의 그림체를 거의 똑같이 그릴수 있는 작가는 아마추어 포함해서 정식 작가중에 엄청나게 많다. 일본의 경우 만화가들이 가장 많이 따라할수 있는 그림체가 드래곤볼 일 정도로 그의 만화를 보면서 영향을 받고 자라 등단한 작가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의 연재 기간에 유명 만화가들이 없었는가? 하면 되려 만화,애니 역사의 황금기일 때라 드볼 연재 전후해서 온갖 천재 작가들의 대표 작품들이 넘처났는데도 그랬다. 그래서 더 대단한 것이다. 어느 정도냐면 원나블 포함해 근 20년간 메가히트 했던 작품들도 드볼 당시로 돌아가면 10위권 유지조차 힘들 정도의 만화황금기였다. 토가시 조차 당시엔 연중의 위기를 수시로 겪었을 정도이니 그만큼 대작들 틈에 끼여서 서로 순위가 널뛰기를 하던 시절에 드래곤볼이 떡하고 버티며 독자들의 1픽 만화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담으로 한국에도 학교에서 드래곤볼을 따라 그리던 학생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고등학교쯤 되면 각반에 1명씩 정도는 완전히 똑같은 수준으로 그릴수 있는 수준에 이른 학생들이 있을 정도였고 남들 보라고 대놓고 그리고 있어도 드래곤볼 만은 흉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점은 토리야마는 만화가로 등단하고 나서도 남의 만화를 거의 보지 않고 거의 그림만 그리고 자신에게만 열중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 그의 성격이 반영되어 그의 그림체가 다듬어지기만 했지 타 작품에 영향받은 기색을 찾아 볼 수 없다.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도 편집부나 타 작품의 영향을 잘못 받아서 한순간에 나락간 수많은 작가들 [* 공작왕의 오기노 마코토 등.] 을 생각하면 다행. 애초에 독보적인 노선을 걷고 있는데 굳이 타 작가나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 등에 영향 받을 이유도 없었다. 드물게 편집부에서 이노우에 신인 작품을 보라고 명령해서 어쩔 수 없이 본적이 있다고 하는데 자료로써 보지 않고 그림 센스있는 작가가 나왔구나 하고 감상만 하고 말았다고.[* 보통 만화가라면 인기작도 인기가 없으면 바로 퇴출되는 점프의 살벌한 경쟁 시스템, 급변하는 만화 시장의 흐름과 경쟁작들의 작품,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해서라도 챙겨보고 영향받기 마련인데 그가 은퇴할때까지 성격이 안변했다.. 그가 워낙 바빠서 그랬다고 말히기도 하지만 사실 토리야마는 전성기의 그 살인적인 업무량을 모두 소화하고 주 2~3일정도는 여유시간을 남겨 메카, 디오라마등의 취미를 즐길 정도로 여가시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그렇게 손이 빠르고 출장이나 외출하는 것을 사절하는 귀차니즘 성격이 된 것도 취미를 즐기기 위해서였으니 그 시간에 남의 작품을 보고 연구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그의 천성이 그랬던 것. 또한 보더라도 이노우에처럼 작가 자체의 평가를 내리지 타 작품의 장점을 탐내거나 질투하는 성격은 아니던 듯하다.] 토리야마 아키라만의 컷 배분 공식을 만들고 완성시켰다. 기존 만화들은 그때 그때 작가가 적당하다고 떠올리는 방식으로 컷을 임기응변으로 나누었는데 토리야마는 컷 배분을 공식화시켜서 그리는 자신도 편하고 읽는 독자도 편하게 구체화시켰다.[* 토리야마 특유의 바쁜 일정과 그에 따라 생겨난 효율주의(귀차니즘) 때문에 그때 그때 생각하기 싫어서 최적화된 컷 배분 공식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완성도가 완벽해서 드래곤볼은 만화 학원에서 컷 배분 교육의 단골 소재로 전세계에서 활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일단 한국 만화 학원이나 서적에선 1번 교육 소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